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랑을 읽고

평범한 성취를 영웅적 성취로 만들어내는 슈퍼장애인을 찾는 비장애인 중심주의는 장애인을 무능력의 상징으로 만들어 동정과 비극으로 자리 잡게 한다.

장애인은 성취가 장애와 모순된다는 믿음으로 무력감을 불러일으키고, 슈퍼장애인의 개념을 내면으로 가져와 방패막이로 삼는다.

그를 통해 사회와 시스템이 그들을 적절히 지킬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회와 시스템은 슈퍼장애인의 성취를 환호할 뿐, 장애인의 손상과 장애의 구분을 모르고 장애인을 특별한 존재로 두고 자신과 구분해 분리한다.

이는 장애인을 더욱 구석으로 몰아넣고 시설 안으로 들여보낸다.

끝없는 성취와 극복에 목매다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 슈퍼장애인이 주는 비극이다.

인간은 살아온 환경과 가족이 주는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절망적이고 두려운 환경이 누군가에게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시선의 다양한 평등 달성이라는 미명 아래 특정 집단은 특정 집단을 비난한다.

하지만 모두가 비난받지 않는 환경에서 살지 않을 수도 없고, 특정 집단에게 인정받는 가치관을 습득한 채 살아갈 수도 없다.

누군가는 결혼이란 옳지 않은 제도라고 비난하며 결혼의 부당함에 대해 열변을 토하지만 누군가는 결혼이 유일한 삶의 희망이 되기도 한다.

‘레드넥’들이 너무 싫어야 하는데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레드넥이 될 수도 있고, 나 자신이 기득권 백인 남성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누군가에게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혐오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길이기도 하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내 집, 내 집인 내 몸은 편안한 공간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집이 불편한 공간이 되면서 더 이상 쉴 수 없고 위로할 수 없는 가치관을 봤을 때, 집을 떠나 삶을 통해 굳힌 가치관으로 특정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하는 것이 망명의 개념이다.

망명은 집단의 지지와 상호간의 위로, 익명성과 세련된 도시에 뿌리를 둔 채 성소수자 활동을 필수로 한다.

그러나 그런 특정 집단이 하는 말과 행동은 모두 괜찮고 옳은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혐오를 바탕으로 한 집단은 혐오를 넘지 못하고 혐오할 만한 대상을 찾아 자신의 그럴듯한 일을 정당화하려 한다.

내가 빠져나온 이전에 살던 나의 ‘집’이 나쁘지 않은 공간이 되면 자신의 말과 행동, 나의 선택이 잘못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정의로 정의되는 길을 찾는다.

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혐오를 찾아야 존재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가장 큰 아이러니다.

존중받기 위해 누군가를 무시해야 하는 현실이다.

결국 내가 익숙하고 어쨌든 내게 위로가 되는 환경과 가치관을 혐오하고 공격하는 것보다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과의 이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혐오하기 위해 혐오를 해서는 혐오만 더 커질 뿐, 문제의식을 불어넣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이제 벗어나야 한다.

내가 만드는 문제의식은 내 집단 안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 결국 다른 집단에게는 배척과 공격의 대상이 될 뿐이다.

어리석어 보이고 편견에 사로잡혀 불평등에 일조하는 이들에겐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 이유를 이해하고 넘어가라는 게 아니라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진 행동을 알아야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운동가들이 환경보호를 위해 그 지역의 필수적인 경제활동을 무시하는 언행을 하는 것이 그런 대표적인 예다.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을 어떻게 나쁘게 볼 수 있을까?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는 언어는 오직 상호간 공격의 신호탄과 재료만으로 소진된다.

나의 존재가치를 위해 타인의 존재가치를 폄하해서는 안된다.

그들을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보거나 어리석은 구시대의 유물로 본다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라이 클레어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의 퀴어다움을 집으로 가져갈 수 있기를 바란다.

” 비장애인 중심주의는 장애인을 들여다보며 ‘프릭쇼’의 대상으로 삼거나 무성애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장애를 가진 여성이나 남성 모두 여성적 존재, 남성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다.

오늘날에도 장애인이 정당한 일자리를 통해 정당한 급여를 받기는 어렵다.

사회는 장애인이 정당한 일자리를 통해 급여를 받는 것보다 적당히 할 수 있는 일을 준 채 합당한 임금을 지급하고 사회서비스를 제공해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길 바란다.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존재 정도로 남는 것이 관리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성과와 경쟁이 필요한 세상에서 장애인은 ‘프릭쇼’를 통해 장애를 과시하고 착취당하고 인정받는 아이러니에 빠진다.

이건 내가 언급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복잡한 문제야. 게다가 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정의를 내리거나 의견을 말할 자격이 없다.

나도 며칠 전 발달장애인 일자리 면접을 보며 많은 고민과 심사숙고에 빠졌기 때문이다.

치매 노인들은 말을 안 해요. 그래서 00씨가 많이 상처받을 것 같아 걱정이네요.”라는 말을 상대기관 담당자에게 전한 내 말은 정말 진심이었을까? 그동안 퀴어와 장애를 하나로 묶는 방식의 흐름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책을 통해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장애인의 장애인에 대한 무성애적인 태도와 도둑맞은 몸에 대한 슬픈 이야기, 그리고 각자의 소망을 담은 각자의 몸과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 대화가 오가기를 바라며, 이 책 표지에 적혀 있는 문구를 보는 순간 힘들고 지치지 않도록 그렇게 서로의 집에서 무모하고 대담한 대화를 나누자. 평범한 성취를 영웅적 성취로 만들어내는 슈퍼장애인을 찾는 비장애인 중심주의는 장애인을 무능력의 상징으로 만들어 동정과 비극으로 자리 잡게 한다.

장애인은 성취가 장애와 모순된다는 믿음으로 무력감을 불러일으키고, 슈퍼장애인의 개념을 내면으로 가져와 방패막이로 삼는다.

그를 통해 사회와 시스템이 그들을 적절히 지킬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회와 시스템은 슈퍼장애인의 성취를 환호할 뿐, 장애인의 손상과 장애의 구분을 모르고 장애인을 특별한 존재로 두고 자신과 구분해 분리한다.

이는 장애인을 더욱 구석으로 몰아넣고 시설 안으로 들여보낸다.

끝없는 성취와 극복에 목매다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 슈퍼장애인이 주는 비극이다.

인간은 살아온 환경과 가족이 주는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절망적이고 두려운 환경이 누군가에게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시선의 다양한 평등 달성이라는 미명 아래 특정 집단은 특정 집단을 비난한다.

하지만 모두가 비난받지 않는 환경에서 살지 않을 수도 없고, 특정 집단에게 인정받는 가치관을 습득한 채 살아갈 수도 없다.

누군가는 결혼이란 옳지 않은 제도라고 비난하며 결혼의 부당함에 대해 열변을 토하지만 누군가는 결혼이 유일한 삶의 희망이 되기도 한다.

‘레드넥’들이 너무 싫어야 하는데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가 레드넥이 될 수도 있고, 나 자신이 기득권 백인 남성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 위로가 되는것이 누군가에게 폭로

망명과 자부심(반양장본) 저자 일라이 클레어 출판 현실문화 출시 2020.03.30。 망명과 자부심(반양장본) 저자 일라이 클레어 출판 현실문화 출시 2020.03.30。